장소와 기억의 유출_영상 작업 위주의 작품설명
저는 주로 일상의 풍경을 수집하며, 그중에서도 거대한 규모로 이뤄지는 파괴와 재건의 풍경들을 적극적으로 담아왔습니다. 직접 그 안에 들어가 변화하는 것들을 감각하고, 거기서 느껴지는 이물질 같은 저 자신을 이질적인 물성으로 치환해 사진, 영상, 설치 작업으로 이어왔습니다. 저에게 장소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시간이 스며 있고 감각이 남아 있다가 나중에 다시 유출되는 표면처럼 느껴집니다.
최근 작업인 <산, Mountain>은 회화 작가 노은영과 서로의 풍경을 공유하며 나눈 대화가 자막이 되는 방식의 작업입니다. 이 작업이 중요했던 이유는 단지 새로운 작품이어서가 아니라, 변화된 삶의 조건 안에서도 여전히 작업을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출산과 육아로 인해 예전처럼 멀리 가서 다양한 장소를 답사하고 촬영하는 일이 쉽지 않아졌고, 이미지를 수집하는 반경과 시간대, 규모는 현저히 줄어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변화된 삶의 조건 안에서 사건들은 여전히 일어나고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됩니다. 영상의 전면에 드러날 장면이 중요했기에 기존보다 더 거친 변화의 풍경이 있는 재개발 현장을 우선 담아보았지만, 막상 현장에서 느끼는 것들이 예전과는 달랐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집 앞 건물이 철거되는 장면을 가까운 거리에서 목격하게 되었고, 포크레인이 돌덩이를 부수고 끌어올리고 떨어뜨리는 진동이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길 만큼 가까웠던 그 경험은 오히려 훨씬 밀접하고 강렬하게 다가왔습니다. 규모는 작을지언정 가까운 거리감, 그리고 늘상 보는 창밖에서 사건이 일어난다는 사실 자체가 기존과는 다른 감각을 발생시켰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오래된 세무서 건물이 철거되는 장면도 우연히 기록하게 되었고, 이 영상들이 결국 작업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이 작업에서 또 하나 중요한 축은 북한산이었습니다. 북한산은 시간의 축적과 땅의 역사성이라는, 작업 전반의 주제에 가까운 이미지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던 사진 속 북한산의 모습과 제가 매일 바라보는 북한산이 감각적으로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는 점에서 중요한 작동 기제가 되었습니다. 같은 장소라도 누가 찍었는지, 언제 보았는지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이미지가 됩니다. 이것이 제가 말하는 유출의 감각입니다. 장소는 그 자리에 있지만, 거기에 쌓인 시간과 기억은 어느 순간 밖으로 새어 나옵니다.
처음에는 삶의 상황으로 인해 작업이 잘 풀리지 않아 불안하게 느껴졌지만, 상황이 바뀌면서 오히려 다른 길을 찾게 되었습니다. 작업 방식의 형식은 삶의 변화에 따라 조금 달라졌어도, 핵심까지 바뀌지는 않았다는 점이 저에게는 중요했습니다.
저는 촬영을 해두고 그것을 곧바로 완성된 결과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촬영한 뒤 시간이 지나 다시 살펴보면서, 그 안에 무엇이 남아 있는지, 어떤 장면이 계속 마음에 걸리는지, 그때는 미처 몰랐던 이야기가 무엇이었는지를 읽어내고 다시 구성해가는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에게 촬영은 끝이 아니라 시작에 가깝습니다.
이전 작업들을 떠올려보면 이 방식은 계속 이어져 왔습니다. <굉음지하>, <네온워터>, <딜레이드 시스템>, <트럭> 같은 작업들은 재개발 공간이나 공사 현장, 이동하는 물질, 우연히 포착된 흔적들을 다룹니다. <굉음지하>는 소멸의 순간에 드러난 마지막 에너지를 포착한 영상 설치이고, <네온워터>는 네거티브 반전 이미지를 통해 중력과 균열의 유출을 시각화한 작업입니다. 이 작업들에서 저는 장소를 단순한 풍경으로 기록하기보다, 그 안에서 감각된 에너지, 흔들림, 균열, 마지막 기척 같은 것들을 붙잡으려 했습니다. 그리고 그 장면들은 촬영 당시 바로 의미가 완성되기보다, 시간이 지난 뒤 다시 보면서 더 또렷하게 읽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 작업들은 모두 장소의 변화가 남기는 감각적 흔적을 붙잡으려는 시도였다고 생각합니다.
<트럭>, <어반 머터리얼>, <슬로우북> 같은 작업에서는 촬영된 이미지가 책의 형태로 확장됩니다. 현장에서 포착한 이미지를 다시 모으고 분류하여, 손으로 넘기고 몸으로 감각할 수 있는 책의 형태로 옮겨가기도 했습니다. 촬영 이후의 시간, 다시 읽고 재구성하는 과정이 작업의 구조를 이룬다는 점에서 영상 작업과 맥락이 이어집니다.
이후 작업에서 장소는 직접적인 풍경에서 벗어나, 표면의 진동과 파동, 반복과 흔들림 같은 감각의 구조로 이동하며 그래픽 영상의 형태로 확장됩니다. <Fast and Heavy>, <Neon 시리즈>, <서페이스>, <∞> 같은 작업들에서는 장소가 더 이상 직접적인 풍경으로만 나타나지 않고, 표면의 진동, 파동, 반복, 흔들림 같은 감각으로 이동합니다. <서페이스>는 디지털 기기의 검은 표면과 그 아래 무한히 확장되는 심연을 다루고, <∞>는 가상의 물질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인지부조화를 다룹니다. 이 지점에서 장소는 더 이상 외부의 특정 현장만이 아니라, 화면의 표면, 신체가 느끼는 흔들림, 감각의 구조 자체로 확장됩니다.
앞선 <∞>, <데이터의 미래>, 그리고 최근 작업인 <굉음지하 2>에서는 일상 안에서 자연스럽게 마주치는 언어의 층위가 본격적으로 더해집니다. 유튜브 다큐멘터리에서 본 자막, 3D 프로그램을 배우는 영상 속 문장들, 커뮤니티 댓글로 이어지는 데이터의 무게에 대한 난상토론까지, 이렇게 발췌된 대화의 파편과 이미지들이 작업 안으로 들어옵니다. 장소에서 감각한 것이 현장의 풍경 그대로만 남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다시 떠오르는 문장, 화면에서 읽은 말들, 다른 곳에서 가져온 언어의 조각들을 통해서도 다시 살아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장소의 감각은 이미지일 수도, 진동일 수도, 언어의 파편일 수도 있습니다.
결국 제가 작업에서 계속 다루고 있는 것은 장소 자체라기보다, 장소 안에 남아 있는 시간과 기억, 감각의 흔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항상 특정 장소나 공간에서 작업이 출발하지만, 거기에 담긴 개인적인 기억과 경험이 투영되고, 다른 시간대와 다른 경험 속의 내가 그것을 다시 볼 때 또 새로운 이미지가 중첩되며 계속 오버랩되는 과정 속에 있습니다. 저에게 장소는 기억이 유출되는 표면이고, 작업은 그 유출의 순간을 나중에 다시 읽어내어 형식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삶의 조건이 바뀌어도, 매체가 달라져도, 그 방식은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